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뮌헨 협정 (문단 편집) === 1938년, 9월 이전 === 1938년 3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논리로 [[나치 독일]]이 국민 투표로 [[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를 합병]]하여 양국이 하나가 되자 [[대독일주의|게르만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대두했다. [[폴란드]][* 특히 [[단치히 자유시]]가 문제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리투아니아]][* [[메멜]] 지방. 1939년 3월에 결국 삥 뜯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쥐트티롤]]. 1943년 이탈리아 항복 후 성립된 독일의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압박해 독일로 편입시켰다.], [[스위스]][* [[1940년]] [[프랑스 침공|프랑스가 항복하자]] [[취리히]], [[루체른]] 등 북부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스위스가 [[추축국|독일 편]]에 붙든지, 아니면 독일어권 지역만이라도 독일에 합병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이는 스위스 정부에 의해 금방 탄압되었지만.] 등에 나뉘어진 독일계들은 강력한 하나된 독일이라는 히틀러의 구호에 열광하며 독일로의 합류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 중 [[이탈리아]]의 [[쥐트티롤]][* 정확히는 오스트리아에 속한 티롤 3지방 가운데 중부인 [[쥐트티롤|보첸 현]].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대가로 얻어냈다.] 지방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하는 대가로 쥐트티롤 지방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지 말 것을 히틀러에게 요구했고 히틀러가 이를 수용했기 때문에 독일의 병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쥐트티롤은 훗날 히틀러가 이탈리아 북부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하면서 [[이스트리아]], [[트리에스테]]와 함께 강탈했다.] 하지만 쥐트티롤을 제외한 지역들에 대해 히틀러는 실제로 병합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우선시되는 곳은 독일인 인구가 가장 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티(Sudety) 지방, 즉 [[주데텐란트]]였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70b9601300eed03aa96e45691a065b41.jpg|width=100%]]}}} || || [[체코슬로바키아]]([[에드바르트 베네시]])를 삼키려는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노리고 그곳의 독일인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당장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독일인들의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서 독일인의 공무원 채용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독일인들의 불만사항 중 하나였다.]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간에 상호 비방이 잇달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5월 20일 예비군을 소집하고 국경 지대에 병력을 배치했으며 프랑스와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소련은 즉각 붉은 군대를 준비하고 프랑스 정부의 주요 인사들도 개입을 주장했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는 양국만이 아니라 전 유럽의 주목을 받는 문제로 비화되었다.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 상 군사 동맹국으로서 유사시 참전할 의무가 있었고 이에 따라 3월 14일 프랑스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대사에게 조약 준수를 약속하는 한편 영국의 입장을 캐물었으나 영국은 조약 준수만을 확인할 뿐 참전 문제에는 미적지근했다. 애당초 프랑스는 영국 없이 단독으로 독일과 싸우는 상황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영국이 미온적으로 나오자 난처한 상황에 몰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